고 약 이 야 기 About "Lee myungnae Goyak" 

11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명래 고약"의 이야기

천우신약주식회사



재미있는 고약의 역사  History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없으니, 전형적인 중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간추려 모은 ‘성원록(姓源錄)’에는 
천 피씨가 두 집안 실려 있는데, 중시조인 피수장(皮壽長)과 
피하조(皮河照)가 모두 무인 출신이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역관, 계사, 율관들과도 혼인했는데,
‘성원록’을 편찬한 이창현은 이 집안을 의원 집안으로 분류했다.

종기를 잘 고쳤던 피재길(皮載吉)의 후손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직계에게는 의원의 맥이 끊어진 듯하다.



"어머니에게 처방 배워 고약을 만들어 팔다."

의원 피홍즙(皮弘楫)은 주로 종기를 고쳤는데, 
백광현과 달리 침으로 째기보다 약을 잘 써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피재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지 못했기에 어머니 박씨가 
남편 옆에서 보고 들었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쳤다.

피재길은 의서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약재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법만 배웠다.
종기를 고치는 온갖 고약을 팔러 여염을 돌아다니면서도 

의원들과 맞서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고약을 사 썼는데, 효험이 매우 뛰어났다.

1793년 여름에 정조 임금의 머리에 헌데가 났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헌데가 얼굴과 턱으로 퍼졌다.
게다가 날씨까지 무더워, 정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의원의 여러 어의(御醫)들도 어쩔 줄 모르고, 

대신들도 날마다 모여 의논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정조를 옆에서 모시던 사관 가운데 피재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불러들여 치료법을 물으시라고 추천했다.



웅담 고약을 처방해 정조의 헌데를 사흘 만에 고치다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

“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재길이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볼 만합니다.”

물러가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자,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정조가 약원(藥院)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名醫)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神藥)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內鍼醫)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監牧官)을 제수하였다.
감목관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원인데, 

대개는 부사나 첨사 같은 지방 수령들이 겸직하였다.
중인이나 서얼이 수령에 천거되려면 감목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감목관 벼슬을 준 것은 나중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서, ‘성원록’에도 피재길을 의원으로 소개하지 않고 
목관(牧官)이라고 소개했다. 의원이 겸하는 명예직인 셈이다.

‘정조실록’ 17년(1793) 7월16일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신기한 효력을 냈기 때문이다.
피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종6품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신의 피재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청구야담’에서는 그의 명성을 이렇게 기록했다.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약원의 여러 의원들이 모두 놀라 감복했으며,
두 손을 맞잡고 그에게 맞서기를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피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으며, 
웅담고약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고 약 이 야 기 About "Lee myungnae Goyak" 

11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명래 고약"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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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해 유배되다."

천금의 처방을 터득했지만,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침의로 승격했지만,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태하고도 귀중한 일이었다.
1800년 여름에 정조가 병에 걸려, 여러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올려도 쾌유되지 않았다.

‘정조실록’ 6월22일 기사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는 기록이 실렸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잡아당기는 통증이 조금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를 이미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수라를 어찌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병정이 “봉해 올린 장고( 膏)는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지금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안부인사를 다 들은 뒤에 “피재길에게 지방의원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온갖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마땅한 약도 없었으므로, 믿을 데라곤 웅담고약의 신의 피재길 한 사람뿐이었다. 
내의원 의원들이 며칠이 되어도 고치지 못하자,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방 의원들이 함께 진찰하였다.

피재길이 진찰하고 나자 정조가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물었다. 
김한주는 푹 곪았다 아뢰었고, 백동규는 고름이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다고 아뢰었다. 
의원들 사이에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자, 정조가 “마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연적만큼 크게 부어오른 곳까지 있었다.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병이 든 지 오래 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의원들은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피재길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또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이제는 피재길도 믿을 수 없었다. 
24일에는 정조가 “어제 정오부터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 한 사람에게만 진찰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의관 가운데 누가 좀 더 나은가?” 물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치료도 끝내 효험이 없어, 정조는 나흘 뒤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정조를 살려내지 못한 의원들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 
7월4일 사헌부에서 “내의(內醫) 강명길과 피재길, 방외의(方外醫) 심인을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냈으니, 속히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약(藥)에 대해 의논한 의원들도 아울러 엄히 조사하여 해당되는 형벌을 속히 시행하소서.”하고 아뢰었다.

곧바로 피재길을 유배 보내라고 명이 떨어졌으며, 언관들은 의원들을 역의(逆醫)라고 명명하였다. 
임금을 제대로 치료 못한 책임 정도가 아니라, 시해한 혐의까지 덮어쓴 셈이다. 
열흘이 넘게 고문당하던 끝에 의원 강명길은 매맞아 죽었으며, 피재길은 7월14일에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침술과 고약 하나로 고약장수에서 종6품까지 올랐던 피재길은 결국 침술과 고약 때문에 천리 유배길에 올랐다. 
전문지식인 중인의 책임이자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까지 애용되는 고약의 효험

20세기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 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공세리 성당을 지었다.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내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이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리다가, 이명래의 민간요법까지 
더해지며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이 개업했다고 한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 넘게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서울신문발췌)



"종기에는 이명래~이명래 고약"

40대 이상이면 누구나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이 광고를 기억할거다.
노란색 기름종이에 붙은 흑갈색 고약(膏藥)을 성냥불에 달궈 

종기에 붙여 놓으면, 며칠 뒤 어김 없이 누런 고름이 덩어리째 
빠져 나오던 경험이 다 있을 테니까.
특유의 냄새가 인상적인 이명래고약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던 ‘국민상비약’이었다.

1920년대 일본군 대좌(대령)사사키는 

목숨을 위협하던 악성종기를 이명래고약으로 단번에 치료한 뒤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그렇게 적었다.

이처럼 이명래고약은 ‘활명수’와 함께 20세기 한국에서 개발된 

최초의 신약이자, 서울을 대표하는 ‘100년 브랜드’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명래(1890~1952년) 선생은 

1905년 프랑스 선교사 드비즈의 도움을 받아 
탁월한 효능을 내는 자신만의 고약을 개발했다.
그는 1920년 서울에 올라와 충정로 중림동 터에 

명래한의원을 차려 고약을 직접 만들었다.
그때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이명래고약과 명래한의원은 

지금도 충정로에서 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가 죽고난 뒤 이명래고약은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뉘었다.
‘이명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했던 

둘째사위 이광진(1996년 타계)씨는 
명래한의원을 이어받아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반면, 고약의 대중화를 원했던 
막내딸 이용재(2009년 타계) 
여사는 1955년 명래제약을 세운 뒤 일부 성분을 변경해 
대량 생산에 나섰다.

우리가 약국에서 보던 이명래고약은 

바로 명래제약에서 만든 것이다.
명래제약은 2002년 부도가 나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다른 제약회사(천우신약)가 판권을 인수해 고약을 만들고 있다.


100년간 서민 종기치료제로 사랑받았던
 `이명래 고약`의 부활

100년 역사를 간직한 추억의 명약 '이명래 고약'이 부활한다.
과거 서민들의 종기 치료제로 애용되다 2001년 생산이 
중단됐던 
이명래 고약을 한 중소 제약사가 다시 시장에 내놓기로 한 것이다.
제약사는 이명래 고약을 생산하던 명래제약을 지난해 말 인수,
고약 생산에 필요한 현대적 자동화 설비 라인을 구축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마땅한 상처 치료제가 없어 

이명래 고약은 종기 치료제로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다.
40대 이상 중·장년층들의 경우 기름 종이에 싼 이명래 고약을 

성냥불에 녹여 종기 부위에 붙이고 다닌 기억을
한두 번쯤은 갖고 있을 정도다.

특히 이명래 고약은 사람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한 

국내 최초의 상표로 기록돼 있다.
이명래 고약은 이씨의 막내딸인 이명재씨가 

1956년 명래제약을 설립,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2002년 이 회사의 도산으로 
시중 약국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이씨의 둘째 사위의 사위인 임재형씨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명래 한의원'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었다.

이런 상황에서 2006년 중소제약사가 명래제약을 인수하면서 

이명래 고약은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금은 좋은 약들이 많지만 50~60년대만 해도 이명래 고약은 

한국의 간판 가정상비약이었다.
고약이 단순히 종기를 치유하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욕창 치료나 각종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하는 효과가 탁월하며
현재 이명래 고약은 부착이 쉬운 밴드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